청산리역사대장정(교원팀) 5일차
Document URL : https://www.kimsaem.net/upgletyle/20064 8월 7일 새벽 5시 자다가 갑자기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어지러운 증상이 나타났다.
어제 점심을 적게 먹은 터라 주린배를 채우려 급하게 먹은 저녁식사가 얹힌데다 배탈까지 난 모양이다. 새벽부터 혼자서 욕실에서 생쇼를 하다가, 실례를 무릅쓰고 어제 발등에 빨간약 신세를 진 전간호사님을 찾았다.
속전속결로 링거를 내 몸에 꽂고 컨디션이 회복되기를 기다렸고 금방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전간호사님은 생명의 은인이 아닐 수 없다.
환자를 돌보고 계시는 전간호사님
7시 30분 우리는 5일차 여정을 시작했다.
나만 정신 못차리는줄 알았더니 많은 대원들이 육체적 고통으로 아파하고 있었다. 병증은 대부분 배탈, 식체였다. 갑자기 바뀐 음식에 적응하지 못한 때문이었다. 이전까지의 대학생 대장정에서는 우리와 비교할 수도 없을정도로 수도없이 차안에 링거가 걸려있었다는 전간호사님의 증언이다.
우리팀에서도 버스속 렁거 1호가 생겼다. 전간호사님께서는 입에 링거줄을 문채로 능숙한 손놀림으로 혈관에 링거 바늘을 꽂았다. 또 한생명이 점점 생기를 찾았다.
생기넘치는 연길 시내의 모습이다. 차도에는 사람이 많고 횡단보도에는 사람이 없다. ^^;
연변 조선족자치주의 주정부 소재지인 연길은 상업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는 만큼 시내가 생각보다 번화했다.
연길시내의 상가건물과 아파트 건물사이에 지붕에 잡초가 무성한 상태로 초라한 건물하나가 있었다.
1907년에 일본인들이 ‘간도소속문제미해결’, ‘조선인 보호’를 명분삼아 연변지방에 침략하였다. 그 해 8월 23일, 용정촌에 '조선 통감부 임시 간도 파출소'를 설치하고 중국의 내정을 간섭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세워진 것이 '연길변무독판공서'이다. 지금은 현판에 보듯이 '길림변무독사무서'라고 되어 있다.
일제의 무단적인 침입은 연변의 여러 민족의 분노를 자아냈고 동시에 청정부의 저항과 항의를 자아냈다. 청정부는 오록정을 파견하여 연변변무를 책임지게 했고 오록정은 확실한 근거를 들이대면서 일제의 침략행위를 규탄하였다.
하지만 부패가 극도에 달한 청정부는 막강한 군사력을 갖고있는 일제의 압력에 굴복하고 오록정을 소환했다. 1909년 9월 8일에는 북경에서 외무대신 량돈언과 주중국일본대사 아베모이다로가 불평등조약인 '두만강중조계무조약' 즉 '간도협약'에 조인하게 된다.
2층방 한켠은 독립운동단체인 간민회가 있던곳이다.
이 건물을 수변루라 하는데 주변에는 원래 여러개의 건축물이 있었다. 23760평방메터에 달하는 넓은 면적을 가지고있었고 동서너비 108메터, 남북길이 220메터인 장방형담장이 있었다. 담장안에는 도합 221칸의 집이 있었고 대청을 중심으로 앞뜰과 뒤뜰로 나뉘여있었다. 남북담장에 각기 큰 대문이 하나씩 있었고 동서담장에는 작은 대문이 각기 하나씩 있었다. 수변루는 남쪽 큰대문으로 들어서면 정면으로 맞닥뜨리는 건물이였다. 근 100년의 세파속에서 다른 건축물과 담장은 다 없어지고 지금은 앞뜰안의 2층루각인 수변루만 외롭게 남아있다.(출처 : [량영철수필] 수변루야! 수변루)
박환교수님 설명동영상
수변루 앞에 있는 상가 건물인데 간판제목이 낯설면서도 재미있다.
이곳을 나와 우린 두만강 방향으로 이동했다.
함경북도 종성군 강양동의 강양역
우리는 두만강 건너 북한 건물과 물장구 몇번 치면 건널 수 있을 것 같은 가까운 강가의 북한을 볼 수 있었다.
월청향이라는 팻말이 있는 곳과 멀지 않은 곳에 삼둔자 마을이 있었다. 지금은 간평이라는 지명으로 되어 있다.
옛날 홍범도 장군이 이 삼둔자 마을에 와서 두만강 건너 고국 산천을 바라보고 "아! 내가 실로 몇 년만에 고국산천을 보는 것이냐" 하면서 눈물지었다는 곳이다.
바로 이 곳에서 1920년 6월 4일, 30명 가량 되는 우리 독립군이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강양 마을을 기습하였다. 강양에는 일본군 헌병순찰대가 주둔하고 있었는데. 불의의 습격을 받은 일본군은 강을 건너 후퇴한 독립군을 따라 삼둔자 마을을 공격하였다. 이에 독립군이 일제사격을 가하여 적을 격퇴하였다. 그것이 삼둔자 전투다.
마을을 등진 산 위 골짜기 부분(위사진)이 삼둔자 전투가 있던 부분이다.
조규태 부단장님의 설명
두만강 뗏목공원으로 가는 버스에서 강건너 철로 변의 군인처럼 생긴 수레끄는 두 남자도 볼 수 있었다.
두만강 뗏목공원 도착 10분전 쯤에 북한의 남양과 중국의 도문을 철길로 통하는 철교를 지나갔다.
10시경 참대나무뗏목 유람을 할 수 있는 두만강공원에 도착 했다.
우리는 두만강이라하지만 이곳의 지명은 도문이며 도문강이라고 부른다.
관광온 중국인들이 뗏목을 타고 있다.
손님을 기다리는 대나무 뗏목. 우리 대원들은 관광으로 온 것이 아니므로 이용하지 않았다.
==공원동영상
10시 45분, 봉오동 전투 전적지에 도착했다. 이곳은 저수지가 조성되어 안쪽으로 걸어들어가면 도문시인민정부에서 세운 봉오동 전투 반일기념비가 있다.
=부단장님 설명 동영상
왕청현 지방의 대감자촌이다. 한글로 되어 있는 간판이 조선족의 존재를 보여주고 있으나 이제는 이곳에 한글 표지판 조차 없을 정도로 경제적인 문제로 조선족은 상해나 북경같은 대도시로 이동하여 그 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사진은 대감자개장국집(보신탕집)이다.^^;
1919년 박영은 봉오골에 옮겨와 학교에서 교편을 잡는 한편 최진동과 손잡고 “도군부(都軍部)”무장단체를 결성하고 무기를 구입하는 한편 학교에다 사관교육과를 설치하고 군사일군을 양성한다.
1920년초에 이르러 “도군부”는 300여명의 대원에 보총 300자루, 권총 50여자루, 기관총 두정을 가진 유력한 반일무장대오로 발전하였다. 박영은 “도군부”참모장으로 임명됐다. 3월 홍범도, 박영 등이 거느린 부대는 함경북도 온성과 무산 등지를 여덟 번이나 진출하여 일제에게 호된 타격을 준다.
악에 받친 일제는 조선주둔군 라남 제19사단에서 한 개 대대를 파견하여 봉오동에 있는 홍범도, 안무, 최진동, 박영 부대를 일망타진하려 시도하였다.
1920년 5월22일, 명월구로부터 왕청현 대감자를 지나 봉오동에 독립군부대를 주둔시킨 홍범도장군은 최진동과 박영이 지휘하는 도군부와 안무가 지휘하는 간도국민회군과 련합부대를 편성한 후 이름을 “대한북도독군부”로 고치고 북로1군 사령관의 신분으로 연변에서 일본군을 족치는 첫 전투를 지휘한다. 박영은 홍범도를 도와 작전을 지휘하였다.
이번 봉오동전투에서 아군은 일본군 150여명을 살상하였는데 이것을 력사상에서 “봉오동전투”라고 부른다.
봉오동전투에서 호되게 얻어맞은 일제는 조선인 반일부대를 소멸하기 위하여 “경신년대토벌”을 벌린다. 이러한 정세에서 분산되였던 조선인 반일부대는 1920년10월20일 경에 화룡현경내에서 “청산리전투”를 벌린다.(출처 : 연변통신-대형다큐멘터리 중국관내의 조선민족(15) - 혈흔 )
==단장님 설명 동영상
식전에 갈증을 달래기 위해 시원한 음료를 한잔씩 나누는 대원들
점심메뉴는 중국속의 전주비빔밥
비빕밥은 역시 맛있게 비비는게 관건~!
한식으로 맛있게 에너지를 충전한 대원들은 오후일정인 발해유적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16시 15분, 발해상경용천부 박물관에 도착하여 발해 유적을 돌아보았다.
발해국상경용천부(上京龙泉府)는 발해의 다섯 중요 도시 중 하나로, 이곳은 일명 동경성(东京城)이라고 부르는 도읍지 이기도 한다.
우리가 찾아간 발해 유적지는 좌측의 경박호와 우측의 목단강시 사이의 평지에 위치해 있었다.
구글어스에서 발해성터 보기 : 발해상경용천부옛성터.kmz
발해유적이 동북공정에 매우 민감한 부분이기 때문인지 발해진 박물관은 광개토태왕비처럼 사진촬영을 금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 곳의 사진은 없다.
16시 30분, 발해상경용천부 옛 성터에 도착하자마자 하필 지도에 동해를 일본해라고 표기해 놓은 것이 가장 눈에 띄어 씁슬한 기분에 답사를 시작했다.
맨 앞에 보이는 성곽의 모습.
발해의 문왕이 757년 처음으로 수도로 삼았으며, 785년에서 794년 동안 동경 용원부로 잠시 수도가 옮겨졌다가 성왕이 다시 이 곳으로 수도를 옮겼다.
성곽 우측에는 옛 우물이 있다.
사진에 보이는 우측길로 더 들어가면 간이 바가지로 물을퍼서 사용하는 화장실이있는데 사용료는 1위안이다. 난간에 다리올리신분이 관리원이다. 아마 이 이물에서 물을 길어 사용하는 모양이다.
성곽 위에 오르면 일정한 간격의 주춧돌이 여러개 있는 것을 볼 수있다. 성곽위에도 커다란 건물이 존재했을 것이다.
성곽 위에서 바라본 성안쪽의 모습. 주춧돌들과 성의 윤곽들을 따라 복원 조감도를 완성했을 것이다.
저 앞에 바라보이는 성곽을 넘어서도 또 성터가 계속된다.
17시 30분, 우리는 상경궁성터에서 발해의 제 1절터로 보고 있는 청나라 강희원년인 1713년에 재건한 흥륭사로(興隆寺)에 도착했다.
문을 들어서자마자 향연기가 절터를 휘감았다. 건물은 이 지역에 많은 석재인 현무암을 많이 사용하여 지어져 다소 어두운 느낌이었다.
군데 군데 복원을 진행중인 건물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주변건물과의 어울림과 상관없이 처마, 기둥, 대들보를 비롯한 모든 부분을 콘크리트로 성의없이 지어진 건물도 보였다.
흥륭사 안쪽으로 들어가면 약 6미터정도 높이의 발해 석등이 있다. 사람 키와 대충 비교해 보면 짐작이 간다.
약 1200년 전에 만든 것인데 현무암재질의 석등이 정교한 조각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석등 뒤쪽의 건물에는 석불이 있는데 우리는 보지 못했다. 그 앞을 지키는 사자상 역시 현무암으로 되어 있었다.
20시 10분, 우리는 해림시에 있는 한중우의 공원에 도착했다.
이곳은 2005년 김좌진장군기념사업회가 해림시에서 기부한 부지에 건립하였다. 한중우의공원을 계기로 국내는 물론 중국 해림에서 김좌진장군의 역사적 평가가가 재조명되었다.
역사관에서 전시물을 설명 중인 단장님
항일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설명을 자세히 해놓은 터널 전시관의 모습.
이 곳은 좌우이념에 대한 치우침 없이 독립운동에 대한 사실에 충실하여 만들어진 공간이라고 단장님은 전했다.
식사를 마친 후 조별 분임토의를 하고 있는 대원들(3조) 사진출처 : 1조 권종수 대원
몸이 조금 힘든 관계로 사진을 변변하게 찍지 못하였고 설명들도 제대로 듣지 못하고 종일 정신을 못차리고 빌빌대기만 해서 오늘은 많은 것에서 후회가 남는 하루 였다. 하지만 오늘의 종착지인 한중우의공원은 하루의 고단함과 피로를 씻어주기에 충분했다. 나 뿐만 아니라 모든 대원들이 그렇게 생각했으리라 생각된다.
버스뒤에 앉은 집행부원께서 왜 해림시를 빨리가고 싶어 했는지 우의공원에 도착해서 바로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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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28 at 20:13:55 댓글
안녕하세요? 이숙경입니다.
선생님이 찍어주신 사진 잘 받았습니다. 고맙습니다.
뒤늦게 발해 상경용천부 사진을 보기 위해 들어왔는데,
아주 깔끔하게 설명도 덧붙여 정리를 해 놓으셨네요. 감탄 감탄^^
제 사진을 살펴보니 없는 사진도 많고, 흐려진 사진도 있어서요.
일부 선생님 사진을 다운 받았습니다(보고서에 김정현 선생님 사진으로 표시하겠습니다).
선생님 사진을 보니 맛있던 비빔밥도 떠오르고 기억이 새롭네요.
선생님 덕택에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다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