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리역사대장정(교원팀) 4일차(2)
Document URL : https://www.kimsaem.net/upgletyle/18999 14시 16분, 식사를 마치고 대종교 3종사 묘역으로 향했다.
만주 화룡현 청파호 언덕에 가면 초라한 무덤 셋이 있다. 하나는 민족사관의 선봉에 섰던 무원 김교헌이고 또 하나는 무장항일운동의 정신적 지주 백포 서일이다. 그리고 그들의 스승이자 국학의 선각인 또 한 사람의 무덤이 그 곳에 있다. 국학이 무너진 우리의 분단 현실을 세월의 무게로 짊어진 채로, 1916년 8월 15일 자진순명(自盡殉命)한 홍암 나철의 무덤이 그것이다.
여기서 우린 그들의 영혼을 기리기 위한 묵념을 올리고 단장님의 설명을 들었다.
그러던 잠시 후 공안이 나타나 카메라를 검색하며 메모리를 지우도록 하였다.
.
내가 얼른 비어있는 메모리를 갈아끼우며 걸어가는 동안 미처 보지 못한 철조망에 걸려 지금도 남아 있는 작은 상처를 입고 말았다
간호사님의 배려로 빨간약이 발라져있는 내 발
버스에 오른 우린 윤동주의 생가가 있는 용정으로 향하였다.
15시 9분, 용정으로 가는 길 우측에 저멀리 산위의 정자가 하나 보였다. 자세히 보면 좌측에 나무도 한그루가 보였다.
바로 가곡 선구자로 유명한 '일송정'인 것이다.
역시 바쁜일정 관계로 일송정 답사를 하지못한 아쉬움을 망원렌즈에 담아 보았다.
용정중학교(대성중학교)로 가는 길이라 들리지 못했던 용정시3중의 모습. 이동중 버스안에서 본능적으로 찍어버린 사진이다.
이 곳은 예전에는 동흥중학교로 불렸었다. 1921년에 천도교 계통의 동흥중학교와 유교 계통의 대성중학교가 설립되었다. 당시 이 두 학교는 300여 명의 학생이 재학하였으며 교사와 학생들은 항일 민족 해방 교육을 받았다. 일제는 이 두 학교를 탄압하기 시작하였고 1927년 10월 용정 주재 일본 총영사관은 영사 경찰을 동원하여 이 두 학교의 교사들을 체포하자, 학생들은 영사관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이런 탄압에도 불구하고 이들 학교에서는 「애국가」「권학가」「학도가」등 가곡과 조선 역사·조선 지리를 열심히 가르쳤다. 일제는 자기들이 펴낸 일본어 등 교과목을 강요하였으나 학교에서는 이를 가르치는 척 하면서 비밀리에 <최신동국사략 最新東國史略> <월남망국사> <이순신전> <안중근전> <국어국본> 등의 교과를 가르쳤다.
용정시내에서 마늘을 싣고가는 경운기
현대식 건물의 개장집
용정의 건설거리의 시장.
15시 20분에 용정중학교에 도착했다.
일제는 1934년 초 동흥중학교와 대성중학교를 합쳐 민성중학교를 만들었으나 강한 반대에 부딪쳐 1년만에 종전대로 분리시켰다. 그 후 일제는 다른 방법을 동원하여 대성중학교 교사 현관의 지붕 모양이 고려 시대 건축물의 특색을 띠었다고 하여 방학중에 허물어 버리고, 일본인에 의한 일본어 교사를 채용하여 감시를 강화하였다. 그러나 일본어 시간에 학생들이 벙어리 시늉을 하는 등으로 저항하자 학교의 동쪽 교문밖에 작은 벽돌집을 짓고 일본 총영사관이 분주소(分駐所)를 앉혔다. 그러자 교원과 학생들은 교문을 남쪽으로 옮겼다.
1939년 일제는 위만주국의 교육령에 의거하여 두 학교를 '용정국민고등학교'로 개편 병합하고 교장에는 형식적으로 조선인을 앉히고, 일체의 권한을 행사하는 부교장에는 일본인을 앉혔으며 일본인 교사들을 배치했다. 합병된 후 학생들은 "밀정을 잡아내자'는 구호를 외치며 7일간 동맹 휴학을 했으며, 학생들은 조선인 밀정교사를 잡아 밀정을 않겠다는 서약을 받기도 했다. 1941년에 일제가 다시 이 학교를 '용정 제2국민고등학교'로 개편하자 학생들은 물리적으로 대결하려 했고 교사들은 사표를 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오늘날 용정중학교가 대성중학교 자리에서 그 전통을 이어 가고 있으며, 무수한 인재를 배출해 냈다.
윤동주시비도 볼 수 있었다.
최근갑선생님을 소개하시는 단장님
용정중학교에 대해 설명하는 단장님
최근갑 선생님과 함께 단체사진
우리는 서전서숙의 옛터가 있는 용정실험소학교로 향했다.
용정실험소학교 전경
반일민족교육의 요람이었던 서전서숙은 비록 1년미만의 짧은 역사로 끝났으나 독립운동사에서는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으며 중국조선민족교육의 역사상에서도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1906년 건립되었을 때의 서전서숙
16시 27분, 우리는 3.13반일의사릉에 도착했다.
북간도의 3.1 운동이라 할 수 있는 3.13운동은 뒤늦게 3.1 운동 소식을 전해 들은 북간도 정착민들이 용정 시내는 물론 1,2 백리 밖 벽촌에서부터 태극기를 준비해 서전벌로 모여들었다.
명동, 정동, 은진, 동흥, 대성학교 학생들도 모두 모여 1만~3만여명이 만세운동을 벌였다.
대회가 끝나자 명동학교 를 선두로 일본총영사관으로 몰려 갔을때 중국 군벌부대와 사복한 일본 경찰의 발포가 시작 되었다.
이때 운동에 참가하여 부상을 당한 인원은 48명,94명이 채포 되었고 19명이 순직하였다고 독립신문 1920년 1월호는 전하고 있다. 현재 19명의 묘소가 그나마 보존이 잘 되어 있어 다행한 일이다.
(출처-독립기념관)
용정시 항일투쟁역사기념회의 최근갑 회장이 정화사업을 벌여 세운 목비에 적힌 내용 - 1919년 3월 13일 연변지구 조선족 인민 군중의 반일 대시위는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과 중국 침략정책에 저항하여 분개한 것으로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려는 일차의 군중적 혁명투쟁이었다. 같은 달 17일 용정 합성리 공동묘지에 수난자 안장식을 장중하게 거행, 이 의사릉을 세우고 일본 제국주의와 지방 당국의 죄행을 항의한 것이다.
(출처-독립기념관)
석비로 바꾼 의사릉 모습.
반일의사릉 앞에서 단장님과 최근갑 선생님의 설명
16시 40분, 우린 윤동주의 생가가 있는 명동에 도착하였다.
명동촌 마을 앞에는 '윤동주 생가'라는 글이 큼지막하게 적힌 비석이 놓여있었다.
코스모스가 시골마을의 운치를 더해줬다.
명동 교회를 세운 김약연 목사 기념비
김약연은 김학연과 함께 1908년 명동서숙(明東書塾)을 세워 숙감(塾監)이 되고, 이듬해 기독교에 입교하여 명동교회를 세웠다. 1910년 3월 명동서숙의 교세(校勢)가 확장되자 교명을 명동중학으로 바꾸고 교장에 취임하여, 문재린(文在麟)·윤영석(尹永錫)·서왈보(徐曰甫)·나운규(羅雲奎)·윤동주(尹東柱) 등을 배출했다. 1911년에는 명동여학교를 설립하여 여성교육에도 힘썼다.
명동촌 관련 내용에 대한 단장님의 설명
명동교회 종각의 흔적(당시 나무위에 종을 달아 두었었다.)
(출처 : 독립기념관)
1910년대의 김약연과 신도들, 그리고 명동교회 교회모습으로 당시 교인은 5백여명이었다고 한다.
건물뒤의 나무에 종각이 보인다.
복원된 명동교회
자택에서 치러진 윤동주의 장례식(1945년 3월 6일)
복원된 윤동주 생가. 복원 전의 모습인 위의 장례식 사진과 처마의 모습이 다르다. 고증이 부족했던 모양이다.
누군가 적어놓은 장난끼 서린 윤동주 생가의 칠판
명동학교 옛터로 가는길에 마주친 연변대학 풍물패 학생들. 위 사진의 학생들은 풍물패 선배들로서 후배들에게 강강수월래를 전수 중이었다.
마당에서 열심히 배우고 있는 후배들
연변대학교 풍물패 학생들 동영상
명동학교 유적지 표지석
명동학교 유적지 표지석 왼쪽에 있는 명동학교 옛터 비석
현지 주민의 설명을 듣고 명동촌의 옛모습을 스케치 하시는 선생님
명동촌의 옛모습을 설명해 주시던 명동여학교 옛터 앞에서 명동중학교 출신 주민분과 한 컷!
명동촌 표지판에서 바라본 명동촌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15만원 탈취의거기념비로 향하였다.
17시 30분경 우린 15만원탈취의거기념비에 도착했다. 기념비 건너편이 의거가 일어난 장소이다.
길건너 의거장소를 바라보면서 의거 내용에 대해서 설명해 주시는 최근갑선생님.
길가 우측 부분이 의거 장소이다. 당시 15만원이 어느정도의 금액이 되는지 감이 오질 않아 최근갑 선생님께 여쭤보았는데, 당시 30원이면 소총을 한 자루 살 수 있는 돈이었다고 하니 독립군에게 어마어마한 보탬이되는 금액인 것이다.
나중에 한국에 와서 안 사실이지만 정우성,송강호,이병헌이 찍은 '놈놈놈'이란 영화의 모티브가 바로 15만원 탈취의거였다고 한다.
의거를 시행한 6인의 독립투사(용정중학교 대성중 기념관에 전시)
15만원탈취사건의 마지막 생존자였던 최봉설(1897∼1973)의 거사 직전 상황을 보여주는 사진과 메모
18시 10분경 용정기원지 용정기원지우물인 용드레우물을 오늘의 마지막여정으로 하고 숙소로 향했다.
용정의 기원에 대해 설명하시는 단장님
18시 47분, 우리는 연길에 도착하여 식사를 마치고 피곤한 몸을 숙소에 뉘었다.
4일째엔 배탈이 난 환자가 꽤 돼었다. 나 역시 피곤한 터라 늘 찍었던 밥먹는 사진을 생략할 정도였다.
내일은 경유지를 거쳐 해림까지 이동을 해야 한다. 날씨가 너무 덥지 않기만 바라며 잠을 청했다.
만주 화룡현 청파호 언덕에 가면 초라한 무덤 셋이 있다. 하나는 민족사관의 선봉에 섰던 무원 김교헌이고 또 하나는 무장항일운동의 정신적 지주 백포 서일이다. 그리고 그들의 스승이자 국학의 선각인 또 한 사람의 무덤이 그 곳에 있다. 국학이 무너진 우리의 분단 현실을 세월의 무게로 짊어진 채로, 1916년 8월 15일 자진순명(自盡殉命)한 홍암 나철의 무덤이 그것이다.
여기서 우린 그들의 영혼을 기리기 위한 묵념을 올리고 단장님의 설명을 들었다.
그러던 잠시 후 공안이 나타나 카메라를 검색하며 메모리를 지우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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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얼른 비어있는 메모리를 갈아끼우며 걸어가는 동안 미처 보지 못한 철조망에 걸려 지금도 남아 있는 작은 상처를 입고 말았다
간호사님의 배려로 빨간약이 발라져있는 내 발
버스에 오른 우린 윤동주의 생가가 있는 용정으로 향하였다.
15시 9분, 용정으로 가는 길 우측에 저멀리 산위의 정자가 하나 보였다. 자세히 보면 좌측에 나무도 한그루가 보였다.
바로 가곡 선구자로 유명한 '일송정'인 것이다.
역시 바쁜일정 관계로 일송정 답사를 하지못한 아쉬움을 망원렌즈에 담아 보았다.
용정중학교(대성중학교)로 가는 길이라 들리지 못했던 용정시3중의 모습. 이동중 버스안에서 본능적으로 찍어버린 사진이다.
이 곳은 예전에는 동흥중학교로 불렸었다. 1921년에 천도교 계통의 동흥중학교와 유교 계통의 대성중학교가 설립되었다. 당시 이 두 학교는 300여 명의 학생이 재학하였으며 교사와 학생들은 항일 민족 해방 교육을 받았다. 일제는 이 두 학교를 탄압하기 시작하였고 1927년 10월 용정 주재 일본 총영사관은 영사 경찰을 동원하여 이 두 학교의 교사들을 체포하자, 학생들은 영사관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이런 탄압에도 불구하고 이들 학교에서는 「애국가」「권학가」「학도가」등 가곡과 조선 역사·조선 지리를 열심히 가르쳤다. 일제는 자기들이 펴낸 일본어 등 교과목을 강요하였으나 학교에서는 이를 가르치는 척 하면서 비밀리에 <최신동국사략 最新東國史略> <월남망국사> <이순신전> <안중근전> <국어국본> 등의 교과를 가르쳤다.
용정시내에서 마늘을 싣고가는 경운기
현대식 건물의 개장집
용정의 건설거리의 시장.
15시 20분에 용정중학교에 도착했다.
일제는 1934년 초 동흥중학교와 대성중학교를 합쳐 민성중학교를 만들었으나 강한 반대에 부딪쳐 1년만에 종전대로 분리시켰다. 그 후 일제는 다른 방법을 동원하여 대성중학교 교사 현관의 지붕 모양이 고려 시대 건축물의 특색을 띠었다고 하여 방학중에 허물어 버리고, 일본인에 의한 일본어 교사를 채용하여 감시를 강화하였다. 그러나 일본어 시간에 학생들이 벙어리 시늉을 하는 등으로 저항하자 학교의 동쪽 교문밖에 작은 벽돌집을 짓고 일본 총영사관이 분주소(分駐所)를 앉혔다. 그러자 교원과 학생들은 교문을 남쪽으로 옮겼다.
1939년 일제는 위만주국의 교육령에 의거하여 두 학교를 '용정국민고등학교'로 개편 병합하고 교장에는 형식적으로 조선인을 앉히고, 일체의 권한을 행사하는 부교장에는 일본인을 앉혔으며 일본인 교사들을 배치했다. 합병된 후 학생들은 "밀정을 잡아내자'는 구호를 외치며 7일간 동맹 휴학을 했으며, 학생들은 조선인 밀정교사를 잡아 밀정을 않겠다는 서약을 받기도 했다. 1941년에 일제가 다시 이 학교를 '용정 제2국민고등학교'로 개편하자 학생들은 물리적으로 대결하려 했고 교사들은 사표를 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오늘날 용정중학교가 대성중학교 자리에서 그 전통을 이어 가고 있으며, 무수한 인재를 배출해 냈다.
윤동주시비도 볼 수 있었다.
최근갑선생님을 소개하시는 단장님
용정중학교에 대해 설명하는 단장님
최근갑 선생님과 함께 단체사진
우리는 서전서숙의 옛터가 있는 용정실험소학교로 향했다.
용정실험소학교 전경
반일민족교육의 요람이었던 서전서숙은 비록 1년미만의 짧은 역사로 끝났으나 독립운동사에서는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으며 중국조선민족교육의 역사상에서도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1906년 건립되었을 때의 서전서숙
16시 27분, 우리는 3.13반일의사릉에 도착했다.
북간도의 3.1 운동이라 할 수 있는 3.13운동은 뒤늦게 3.1 운동 소식을 전해 들은 북간도 정착민들이 용정 시내는 물론 1,2 백리 밖 벽촌에서부터 태극기를 준비해 서전벌로 모여들었다.
명동, 정동, 은진, 동흥, 대성학교 학생들도 모두 모여 1만~3만여명이 만세운동을 벌였다.
대회가 끝나자 명동학교 를 선두로 일본총영사관으로 몰려 갔을때 중국 군벌부대와 사복한 일본 경찰의 발포가 시작 되었다.
이때 운동에 참가하여 부상을 당한 인원은 48명,94명이 채포 되었고 19명이 순직하였다고 독립신문 1920년 1월호는 전하고 있다. 현재 19명의 묘소가 그나마 보존이 잘 되어 있어 다행한 일이다.
(출처-독립기념관)
용정시 항일투쟁역사기념회의 최근갑 회장이 정화사업을 벌여 세운 목비에 적힌 내용 - 1919년 3월 13일 연변지구 조선족 인민 군중의 반일 대시위는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과 중국 침략정책에 저항하여 분개한 것으로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려는 일차의 군중적 혁명투쟁이었다. 같은 달 17일 용정 합성리 공동묘지에 수난자 안장식을 장중하게 거행, 이 의사릉을 세우고 일본 제국주의와 지방 당국의 죄행을 항의한 것이다.
(출처-독립기념관)
석비로 바꾼 의사릉 모습.
반일의사릉 앞에서 단장님과 최근갑 선생님의 설명
16시 40분, 우린 윤동주의 생가가 있는 명동에 도착하였다.
명동촌 마을 앞에는 '윤동주 생가'라는 글이 큼지막하게 적힌 비석이 놓여있었다.
코스모스가 시골마을의 운치를 더해줬다.
명동 교회를 세운 김약연 목사 기념비
김약연은 김학연과 함께 1908년 명동서숙(明東書塾)을 세워 숙감(塾監)이 되고, 이듬해 기독교에 입교하여 명동교회를 세웠다. 1910년 3월 명동서숙의 교세(校勢)가 확장되자 교명을 명동중학으로 바꾸고 교장에 취임하여, 문재린(文在麟)·윤영석(尹永錫)·서왈보(徐曰甫)·나운규(羅雲奎)·윤동주(尹東柱) 등을 배출했다. 1911년에는 명동여학교를 설립하여 여성교육에도 힘썼다.
명동촌 관련 내용에 대한 단장님의 설명
명동교회 종각의 흔적(당시 나무위에 종을 달아 두었었다.)
(출처 : 독립기념관)
1910년대의 김약연과 신도들, 그리고 명동교회 교회모습으로 당시 교인은 5백여명이었다고 한다.
건물뒤의 나무에 종각이 보인다.
복원된 명동교회
자택에서 치러진 윤동주의 장례식(1945년 3월 6일)
복원된 윤동주 생가. 복원 전의 모습인 위의 장례식 사진과 처마의 모습이 다르다. 고증이 부족했던 모양이다.
누군가 적어놓은 장난끼 서린 윤동주 생가의 칠판
명동학교 옛터로 가는길에 마주친 연변대학 풍물패 학생들. 위 사진의 학생들은 풍물패 선배들로서 후배들에게 강강수월래를 전수 중이었다.
마당에서 열심히 배우고 있는 후배들
연변대학교 풍물패 학생들 동영상
명동학교 유적지 표지석
명동학교 유적지 표지석 왼쪽에 있는 명동학교 옛터 비석
현지 주민의 설명을 듣고 명동촌의 옛모습을 스케치 하시는 선생님
명동촌의 옛모습을 설명해 주시던 명동여학교 옛터 앞에서 명동중학교 출신 주민분과 한 컷!
명동중학교 출신 주민분의 설명
명동촌 표지판에서 바라본 명동촌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15만원 탈취의거기념비로 향하였다.
17시 30분경 우린 15만원탈취의거기념비에 도착했다. 기념비 건너편이 의거가 일어난 장소이다.
길건너 의거장소를 바라보면서 의거 내용에 대해서 설명해 주시는 최근갑선생님.
길가 우측 부분이 의거 장소이다. 당시 15만원이 어느정도의 금액이 되는지 감이 오질 않아 최근갑 선생님께 여쭤보았는데, 당시 30원이면 소총을 한 자루 살 수 있는 돈이었다고 하니 독립군에게 어마어마한 보탬이되는 금액인 것이다.
나중에 한국에 와서 안 사실이지만 정우성,송강호,이병헌이 찍은 '놈놈놈'이란 영화의 모티브가 바로 15만원 탈취의거였다고 한다.
의거를 시행한 6인의 독립투사(용정중학교 대성중 기념관에 전시)
15만원탈취사건의 마지막 생존자였던 최봉설(1897∼1973)의 거사 직전 상황을 보여주는 사진과 메모
18시 10분경 용정기원지 용정기원지우물인 용드레우물을 오늘의 마지막여정으로 하고 숙소로 향했다.
용정의 기원에 대해 설명하시는 단장님
18시 47분, 우리는 연길에 도착하여 식사를 마치고 피곤한 몸을 숙소에 뉘었다.
4일째엔 배탈이 난 환자가 꽤 돼었다. 나 역시 피곤한 터라 늘 찍었던 밥먹는 사진을 생략할 정도였다.
내일은 경유지를 거쳐 해림까지 이동을 해야 한다. 날씨가 너무 덥지 않기만 바라며 잠을 청했다.